김동훈 기자
김동훈 기자의 슬램덩크
‘농구 대통령’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는 이따금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겸연쩍은 미소만 지을 뿐. 1997년 5월, 프로농구 원년 우승컵을 놓고 부산 기아와 원주 나래가 맞붙었다. 그러나 기아의 ‘트레이드 마크’ 허재는 코트에 서지 못했다. 뺑소니 음주사고 뒤 팀에 복귀했지만, 기아는 이미 ‘허재의 팀’이 아니었다. 기아는 역사적인 프로농구 원년 챔피언에 올랐지만, 허재는 웃을 수 없었다.
2006년 4월, ‘국보 센터’ 역시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 서울 삼성은 울산 모비스를 3전 전승으로 몰아붙인 뒤 마지막 4차전에서도 승리를 굳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장훈은 끝내 코트에 서지 못했다. 언론은 이 경기를 두고, ‘죽은 제갈공명(서장훈)이 산 사마달(모비스)을 쫓아냈다’면서 별로 뛰지도 않은 서장훈을 칭찬했다. 그러나 서장훈은 기뻐할 수 없었다. 안준호 감독은 우승 뒤풀이 자리에서 풀 죽어있는 서장훈을 연신 다독였다.
허재와 서장훈. 1980년대와 90년대 한국 남자농구를 대표하는 두 남자는 절치부심했다. 허재는 1997~98시즌 챔피언전에서 팀이 준우승에 그치고도 최우수선수(MVP)에 뽑히며 명예회복에 성공했다. 세월이 흘러 전주 KCC 감독으로 변신한 그는, 지난 시즌 꼴찌로 추락하며 다시 한번 자존심에 금이 갔다.
서장훈은 지난 시즌 팀이 4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며 명예를 되찾지 못했다. 그는 5년 계약기간이 끝난 올해 미련없이 팀을 떠났다.
그리고 허 감독의 KCC를 선택했다. KCC는 영입의사를 밝힌 세 구단 가운데 가장 적은 돈을 써낸 팀이다. 서장훈은 “돈이 문제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허 감독은 선수시절 유난히 ‘센터 복’이 많았다. 용산고에 다닐 때는 이민형과, 중앙대와 기아 시절에는 한기범-김유택과 손발을 맞추며 밥 먹듯이 우승했다. 선수 말년에도 TG삼보에 입단한 14년 후배 김주성과 호흡을 맞춰 정상을 맛봤다.
그리고 이번에는 ‘국보 센터’ 서장훈과 만났다. 9년 터울인 둘은 대표팀에서 2년이나 한 방을 썼다. 자존심 강한 두 남자가 다가올 시즌에 빚어낼 ‘작품’이 정말 궁금하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