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경찰이 21일(현지시각) 저녁 예비역 부분 동원령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한 사람을 끌고 가고 있다. 모스크바/타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동원령’을 선포하는 도박에 나섰다. 러시아 민족주의를 동원하고, 서구엔 절대 넘지 말아야 할 ‘레드라인’(금지선)을 그으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이어진다. 하지만 시민 저항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 반석 같아 보이는 푸틴 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푸틴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오전 예비군을 소집하는 부분 동원령을 발동하자, 러시아 전역에서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러시아의 인권단체 ‘오브이디 인포’(OVD-Info)는 이날 동원령에 항의하는 시위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전국 38개 도시에서 일어나 적어도 1307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이 시위는 지난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일어난 사실상 첫 전국 규모의 시위라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했다. 시위가 커지자, 러시아 검찰은 시위에 참가하면 최대 15년 형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모스크바에선 이날 저녁 시위대가 모여 “전쟁 반대”를 외쳤다. 그러자 15분 만에 무장 경찰이 출동해 적어도 10여명을 체포해 끌고 갔다. 한 시위 참여자는 “그들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건 우리 아이들의 목숨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 참가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주변의 친지들이 희생될 것이라며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다.
푸틴 대통령이 동원령을 결단한 가장 큰 이유는 새 병력을 투입해 악화되는 전황을 만회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서방 관측통들은 과감한 도박을 통해 국내외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도 엿보인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에서 일했던 정치컨설턴트 글레프 파블롭스키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긴장) 격화는 우리 시스템의 규범이다”라며 “크렘린은 즉흥적으로 처리하고, 지금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지적대로 일부 러시아 민족주의 인사들은 환영 메시지를 쏟아냈다. 도네츠크 지역의 러시아 반군 지도자였던 이고리 기르킨은 이날 텔레그램 채널에 “러시아가 마침내 진정한 싸움을 할 준비가 됐다”고 칭찬했다.
대외적으로 보면, 이번 전쟁에서 미국 등이 넘지 말아야 할 새 ‘레드라인’을 긋는다는 의미도 있다. 동원령 선포에 앞선 20일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네 지역 대표들은 일제히 23~27일 러시아 편입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주민투표가 통과되면, 이 지역에 대한 공격은 이제 ‘러시아 본토에 대한 공격’이 된다. 이에 발맞춰 러시아는 새로운 핵 위협을 내놓았다.
푸틴 대통령은 동원령을 발표하는 텔레비전 연설에서 서구를 겨냥해 “우리 나라의 영토적 통합성이 위협받을 때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물론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 편입한 영토에 우크라이나가 공격을 가하면 핵무기를 쓸 수 있다고 위협한 것이다.
하지만 이 도박이 어떤 최종 결과를 가져올지는 불투명하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반전 시위의 움직임이다. 러시아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선 40여명이 모여 동원령 반대 시위를 벌였다. 휠체어를 탄 한 여성 시위자는 “빌어먹을 ××놈이 우리 머리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놈을 지켜주고 있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하겠다”고 외쳤다.
‘베스나’ 등 러시아 반전 단체와 야당 지도자들도 시민들에게 거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베스나는 “우리의 아버지, 형제, 남편이 전쟁이라는 믹서기에 던져지고 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죽고, 어머니와 아이들은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가”라고 호소했다. 수감 중인 러시아 반정부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도 변호인들이 공개한 비디오 메시지를 통해 “이 범죄적 전쟁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푸틴은 수많은 사람을 피로 물들이려 하고 있다”며 시민들의 항의 시위를 독려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 일반토의에서 화상으로 연설을 하고 있다. 뉴욕/로이터 연합뉴스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은 <시엔엔>(CNN) 기고에서 이번 조처를 통해 푸틴 대통령이 사실상 국내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동원령으로 “푸틴과 러시아 국민이 맺은 암묵적인 사회계약, 즉 시민들이 푸틴과 당국에게 전쟁을 허락한 대신 자신들의 사생활을 방해하지 말라는 약속이 깨졌다는 것”이다. 동부 시베리아에서 온 가난한 군인들의 전쟁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러시아 중산층의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의 권력 기반은 여전히 탄탄하다. 11일 전국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통일러시아당은 다시 한번 압승을 거뒀다. 전쟁 이후 이어진 애국주의 열풍에 의해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도 80%에 이른다. 하지만 여론은 묘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민간 연구단체인 레바다 센터가 14일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지난 8월 응답자의 76%가 전쟁을 지지하면서도 74%는 이를 우려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로버트 리 미국 외교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동원령 선포는 “푸틴이 내린 중요하고 위험한 정치적 결정”이라며 “전쟁은 이제 점점 러시아 쪽에서 치러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정의길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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