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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시장에서 산 싱싱한 웃음 한 봉지

등록 2006-08-29 18:48수정 2006-08-30 15:28

김옥숙/소설가
김옥숙/소설가
희망나무 /

미영은 회사의 구조조정 때문에 실직한 남편과 부부싸움을 심하게 했습니다. 할인점 일을 마치고 지쳐 집에 들어왔을 때, 소파에 누워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던 남편을 보자 험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미영은 남편이 밉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 속을 한참 끓여야 했지요.

바람이나 쐴 겸해서 밖으로 나온 미영은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시장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새댁이요, 재첩 안 살란교? 이거 거저다, 거저! 술 마시고 속 쓰리다카는 신랑, 속 풀어주는 데는 뭐니뭐니 해도 재첩국이 최곤기라.”

미영이 머뭇거리자 옆에서 채소를 팔던 젊은 남자가 한마디 거듭니다. “저 아지매 말, 순 거짓말인 기라요. 거저 준다케놓고 돈은 꼭 받심더.” “이 문디야! 누구 장사를 말아 묵을라카나?”

재첩을 팔던 아줌마가 남자의 등짝을 한 대 때리는 시늉을 했지만 정작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합니다. 미영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집니다. 재첩을 달라고 하자 아줌마가 반 소쿠리나 덤으로 더 덜어줍니다. 몇 발짝 옮기자 할머니 앞에 놓인 싱싱한 고추와 상추가 눈에 들어옵니다. 매콤한 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된장찌개에 썰어 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 고추 한 소쿠리 말구요, 반만 주세요. 냉장고에 고추가 좀 남아 있는데 시들시들해서요.”


“내가 집에 고추를 봤다 아이가. 참말로 시들시들하더라. 이 고추는 탱글탱글하이 울매나 맛이 좋은지 모린다.”

할머니가 미영의 집 냉장고에 들어 있는 고추를 봤다니요. 영문을 몰라 무슨 말인지 되묻자 옆에 앉아 있는 아줌마가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습니다. 할머니는 시치미를 뚝 떼고 웃음만 머금고 있을 뿐입니다. 뒤늦게 농담의 의미를 알아차린 미영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속이 없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남편이 만약 옆에 있다면 같이 큰 소리로 웃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남편과 언제 싸웠는지 그 울화증도 저만치 날아가 버렸지요.

좌판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대형할인점의 계산대에서 근무하는 미영은 “제가 웃지 않는다면 1000원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적힌 배지를 달고 일을 합니다. 기계적인 억지 웃음일 뿐입니다. 하지만 시장 사람들은 채소 한 줌, 과일 몇 개를 더 얹어 주며 덕담과 우스갯소리도 덤으로 주는 여유를 잃지 않았습니다. 시장의 웃음은 싱싱하게 살아 있는 웃음, 진짜 웃음이었지요.

시장에서 산 싱싱한 웃음 한 봉지를 들고 가는 미영의 캄캄하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김옥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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