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경/<고대신문> 기자
대학별곡 /
농활이 한창 진행 중이던 무더운 여름밤에 뒷풀이 술자리에서 ㄱ대 한 여학생이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의 사연은 이러했다. 농사일 돕기를 하고 있던 그날, 그녀가 일손을 거들던 밭의 주인인 할머니가 나이가 들고 몸이 고되 맛있는 새참은 준비하지 못했다며 손에 빵 하나를 쥐어주신 것. 양말 속에서 나온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준비해주신 그 빵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며, 자신이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써버리는 천 원 한 장에 미안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 해 농활은 그렇게 그녀의 가슴에 새겨졌다. 농민들의 생활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으로.
농활은 1928년 일제와 지주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일어났던 갑산 화전민 투쟁에 신간회가 학생을 파견했던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학생들이 농민들 속에서 함께 노동하고 토론하게 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농활의 형태가 시작된 것이다. 1970년대에 본격화된 농활은 87년 민주항쟁 이후 전국 농민회 총연합(이하 전농)과 학생들이 함께 준비하는 오늘의 농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농활은 운동권 학생들의 행사였다. 농활대가 마을에 도착하면 경찰이 나와 인원을 확인하기도 했고 경찰의 저지로 마을로 몰래 들어가기도 했다. 운동권 학생들이 주도하기는 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농활에 참가했으며 한때는 농활이 대학생이라면 꼭 한번 가봐야 할 행사로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농활은 참여 학생 수가 줄어들고 학생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농활에 참가했다는 고대권(고려대 96학번)씨는 “10년전 만 해도 한 단과대에서 300여명의 학생이 농활에 참가하기도 했다”며 “마지막 농활 때는 농활 참가자가 부쩍 줄어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2006년 농활, 서울대는 참가학생이 지난해 500명에서 올해 400여명으로, 경북대는 지난해 400여명에서 올해는 300여명으로 줄었다. 지방 대학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 충남대, 한남대 등은 100명 미만의 학생들이 농활에 참가했다. 아직까지는 참여 학생이 많은 편이라는 고려대도 600여명 정도이며 이조차도 일부 단과대에 학생들이 집중되어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농활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일을 하고 돌아오는가. 과거에는 전농과 한총련에서 농활의 기조를 정하면 그에 따라 학생들이 농민들과 기조에 대해 토론하고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기조와는 별도로 농활대마다 독자적인 활동이 늘었다. 정치적인 의도는 배제하고 생활 밀착형 봉사활동을 떠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여성 농민들과 맛사지 시간을 가진다던가 마을 단위로 컴퓨터 교육을 하는 것이 좋은 예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마을에 벽화를 그리기도 한다. 학생들이 어떠한 의도로 농촌을 찾던지 젊은 그들은 마을의 활력소가 된다. 고려대 농활대가 방문했던 괴산군 농민회의 사무국장 이용희(남,37세)씨는 “농활대가 농민들의 하루 일과를 잘 몰라서 종종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부족한 일손에는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최근 성균관대에서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농민학생연대활동은 봉사활동이 아니라며 농활을 이 학교가 졸업요건으로 제시하는 품성 가운데 하나인 ‘인성품’에 해당하는 봉사활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전농과 한총련이 준비하는 농활은 농민학생연대활동이다.
이들은 농활을 농촌봉사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한다. ‘봉사’는 한 쪽이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지만 ‘연대’는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하기 때문이란다. 결국 성균관대에서는 농민학생연대활동과 농촌봉사활동을 각각 주관자가 다른 상태로 양분해 다녀오는 일이 벌어졌다.
농활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있는 말이 ‘봉사’든 ‘연대’든, 살아가는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만나 삶에서 공통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당신의 여름은 어떠한 뜨겁고 소중한 기억으로 마무리 될 것인가.
조은경/<고대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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