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순례/서적백화점 책방의 서가는 일종의 길. 수많은 사람들이 열 지어 지나며 책을 빼어 형태를 허물고 주인은 똑같은 또는 새로운 것으로 그 자리를 메운다. 그들이 허물고 다시 쌓는 것은 책이 아니라 꿈인 것. 그러기에 사람의 행렬과 허물고 쌓음이 끊임없지 않겠는가. 서적백화점(577-9876, 강남구 개포동 168-8 석일빌딩)은 곳곳이 파헤쳐진 도로 공사판 같다. 새학기가 겹치기도 했거니와 책의 흐름이 빨라 그런 느낌이 더하다. 몇몇 대형서점이 도시에 군림하는 터에 이 책방이 늠연하게 버티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박리다매다. 싸게 팔 수 없는 것을 빼고는 모두 싸게 팔고 그 한도는 인터넷서점과 비슷하다. 주인 정도현(43)씨나 열다섯 직원들은 책의 흐름에 응해 끊임없이 움직여 여벌의 틈이 없다. 책과 손님과 일체가 된 흐름은 책의 농도나 매출의 밀도를 반영하듯 끈적끈적하여 국외자가 끼어들기 민망하다. 사우나처럼 후끈 달아오른 250평 공간의 한켠. 문과 동시에 계단을 오르면 ‘새책방 속의 헌책방’이다. 40평 공간에 각종 중고교생용 참고서와 어린이책이 3/4을 차지하고 그 책의 뒤편 또는 나머지 공간에 일반 헌책이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학부모와 자녀들이 따로 또 함께 부산하게 책을 고르고 계산한다. 학기초가 지나면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갈 터이다. 헌책방 뒤쪽 책창고에서 책뭉치 위에 앉은 채 정씨와 마주했다. “신간과 헌책은 상보적인 관계입니다. 없는 책을 서로 보완하고, 얇은 주머니 사정을 보완해주죠.” 윤팔병(현재 아름다운 가게 공동대표)씨한테서 독립해 헌책방을 차린 것은 85년. 말죽거리 은광여고 골목에서 시작해 89년 이곳 개포고등학교 옆으로 이사하면서 새책을 겸하게 되었다. 지금은 관계가 역전돼 헌책방은 매출의 10%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새책은 정해진 값에 물건이 오간다면 헌책은 덤으로 정이 오간다고 할까요. 헌책 손님은 느낌이 각별해요. 단골관계가 생기는 것도 헌책입니다. 손님이 무엇인가 건져가면서 흐뭇해하는 모습이 보이고 저 역시 덩달아 기분이 즐거워지죠.”
새책은 대형서점, 인터넷서점, 홈쇼핑, 마트 등이 무한경쟁하는 분야. 50~100곳의 동네책방과 맞먹는 그들과 겨루려면 값이나 구색에서 죽을 힘을 다해야 버틴다. 그나마 한숨을 돌리는 쪽이 헌책방이다. 20여년의 노하우가 있으려니와 속도가 느리지만 열심히 하는 만큼 표가 나는 정직한 분야다. 새책을 출납하고 손님을 응대하느라 잔뜩 긴장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공간도 이곳이다. 하지만 새로 뽑은 직원은 이곳을 뜨아해한다. 힘들고 지저분하다는 선입견 때문. “헌책 10권을 재활용하면 나무 한그루를 살린다”면서 직원을 설득하고 손님들한테 홍보해 지금껏 그 공간을 유지한다. 영수증에 “헌책방문 매입합니다”란 문구를 찍어 발행하고 책값 산정은 정씨 자신이 직접해야 할 때가 많다. 매출만 따져서는 결코 유지할 수 없다. 헌책시장이나 정씨 자신이나 출발한 곳에서 한참 멀리 와 있는 셈이다. 미혼인 그는 올해 안에 ‘신방’을 꾸민다. 문막에서 10~15분 거리에 100평 규모의 고서 박물관을 열어 옛 교과서, 각종 초판본, 희귀본을 전시할 계획이다. 20여년 연애를 해온 고서들이 일정한 테마를 갖췄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둘러보아 ‘느낌’을 가질 정도가 되었다는 판단이다. 과부는 은이 서말, 홀아비는 이가 서말이라는데, 우리 총각 사장은 웃음이 서말이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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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헌책방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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